2020. 9. 6. 연중 제31주일

2020. 9. 6. 22:58끄적끄적/말씀 새기기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마태 18,17)


이번 주에 받은 말씀은 이 말씀.

  살다보면 참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게 된다. 보통은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지만, 유독 사람들과 더 부딪치는 그런 사람이 있다. 나도 처음에는 그 사람과도 잘 지내보려고 이야기도 하고, 조언아닌 조언도 해보고, 이해하려 노력해본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다른 사람들처럼 그 사람을 포기하고 적당한 거리를 두며 지내게 된다. 어쩔 수 없는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찝찝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괜시리 내가 잘못하는 것 같은 마음이 들지만, 이내 잊어버리곤 한다.

 어쩌면 그런 마음에 위로를 주는 말씀처럼 들린다. '아, 하다 안되면 이렇게 해도 되는구나, 모든걸 떠안고 가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지만 그전에, 나에게 잘못한 그 사람에게 세 번의 기회를 각각 다른 방식으로 주어야 한다는 것은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이다. 단둘이 만나보고, 한두사람을 더 데려가서 만나보고, 그래도 안되면 교회를 통해서 이야기 해 본 다음에야 드디어 그 사람을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길 수 있다니. 생각해보면 나는 그저 내 방식대로 몇번 해보다가 안되면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처음의 방식으로 똑같이 가서 부딪쳐서 (당연히)실패하고는, '역시 안되는건가' 라고 생각했던 모습은, 그저 그 사람을 포기하기 위한 내면의 합리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앞으로는 내 방식이 아닌, 예수님께서 가르쳐준 방식으로 접근해 보아야 겠다. 그러다 안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그런데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는 것이 그 사람을 포기해도 된다는 말씀이 맞을까? 어쩔 수 없으니 놓으라는 말씀이셨을까?

 다시 읽어보니 포기라는 말은 나와있지 않았다. 그저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셨을 뿐이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또 생각해보았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민족 사람들과 세리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이방인 여자가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며 소리지를 때에도, 자캐오가 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기다렸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른체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을 바라보시고, 그들의 마음을(믿음을) 헤아리신 후에 그들에게 또 다시 손을 내밀어 주셨다. 

 아,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니었나보다. 그것은 하나의 기다림이었던 것 같다. 내가 손을 내밀었을 때,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필요한 시간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한번에, 또 어떤 사람은 두번에, 또 어떤 사람은 한참 후에야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은 사람마다 처한 상황, 겪어온 삶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은 의심하고, 또 어떤 사람은 두려워 하다가 비로소 손을 잡아볼 용기(그렇다. 내밀어진 손을 잡는 것 또한 용기가 아닐까?)를 내어볼 테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세 번 다가갔다가 안되면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신 말씀은 그 사람을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상대방이 용기를 낼 때까지 기다려 주라고 하신 의미였을 거라고 생각해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보고 그래도 안되면,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고 기다려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

아 그래서 마지막에 기도에 대한 말씀을 하신걸까? 혼자 시도하고 혼자 포기하지 말고, 함께 시도하고, 함께 기도하며 기다리라는 것. 그 말씀이 하고 싶으셨던 것이 아닐까.

 한때 '그리스도인은 먼저 손 내미는 사람' 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실수 했을때나, 소외된 사람이 있을 때 내가 먼저가서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손 내밀고, 안되면, 다른 손도 같이 내밀어보고 하다하다 안되면 그에게 내밀었던 그 손을 모아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함께 기도하는 사람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