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18.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2019. 6. 19. 01:26끄적끄적/말씀 새기기

#오늘의 말씀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2코린 8,9)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오늘의 생각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6)


시대가 변했다.
요즘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세상이 인간성을 잃어가는 것일까?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잃어버린 것 같다.
 사실 잃어버렸다기보다는 사랑하는 법, 사랑받는 법을 잘 배우지 못했고, 그것을 잘 가르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사랑을 주기보다 눈치를 주고, 사랑을 받아들이기보다 눈치를 본다.

사랑하는(주는) 것과 사랑받는것은 마치 고리와도 같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사랑받는 법을 알 수 없듯, 사랑받지 않은 사람은 사랑하는 법을 알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받은 사람의 표현을 학습한다.
'이런 반응은 사랑을 주는 사람을 기운빠지게 하는구나', '이런 것에도 이렇게까지 반응해주니 기분이 좋은데?'

사랑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법을 학습한다.
'이런걸 받으니 좋구나, 나도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해주면 좋아하겠지?', '이런건 과하구나, 이정도만 해주는 것으로도 충분하겠지?'

사실 이러한 과정은, 내 안에 있는 '나의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내가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어떤이는 사랑으로 기쁨을 전하고, 어떤 이는 사랑으로 위로를 전하며, 어떤이는 사랑으로 아픔을 전해준다. 모두가 가진 사랑이 다 다르다.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시편 8,6)었던  부분에서 우리가 가진 사랑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우리는 그분의 모상을 따라 만들어졌으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품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 '그 자체'일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우리의 사랑은 완전하지 않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서 우리 각자가 가진 사랑의 부족함을 채워볼 수 있다.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을 주고, 상대방이 주는 사랑을 받으며,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종류의 사랑을 발견하고 내면화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내 안에 있는 사랑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건 너무 과하잖아, 이건 사랑이 아니야', '겨우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고? 이게 무슨 사랑이야?'
'내 사랑이 너의 사랑보다 더 커', '나만 널 사랑해...(넌 날 사랑하지 않아)...'

때문에 사랑을 받으면서도 더 큰 사랑을 요구하게되고 그로인해 싸우고, 지치고, 멀어지기도 한다.

사실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가 알고있는 사랑의 스펙트럼이 다를 뿐인데도, 단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으로 취급하지 않고, 내가 이해하는 사랑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 잠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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